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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난과 감동의 입문 시절
 
  한국어와의 만남
 
 내가 한국어를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였다. 당시는 NHK의 "한글 강좌"도 시작되지 않았고, 교과서도 그다지 많지 않은 시기였다. 원래 어학을 좋아하던 나는 독학으로 글자를 읽는 공부를 했지만, 스승이 없는 공부는 매우 어렵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민족 단체가 여는 한국어 강좌의 권유를 받아 그 강좌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문법이 일본어와 비슷해서 배우기 쉽고 또 조국의 말이라는 것도 있어서 점점 재미가 붙게 된 나는 학교 공부를 내벼려 두고 (하긴 공부 못 하는 애였지만) 한국어 공부에 몰두하게 되었다.
 강좌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쳐 주셨지만 아쉽게도 그는 어학 전문가가 아니었다. 민족 단체의 한 성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아주 자세히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강사용 매뉴얼은 있었지만 그것은 강사가 역량이 있어야 비로소 충분한 활용을 할 수 있는 법이다. 특히 용언 활용은 뭐가 뭔지 영 알 수 없었다. 적당한 문법서도 가지지 않았던 나는 사전의 권말에 달려 있는 문법 설명의 도움으로 혼자 용언 활용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강좌에 다닌 지 1년쯤이 지나면 인사말과 간단한 문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 입시"라는 장벽을 앞두고 결국 부모의 반대 때문에 강좌에서의 공부는 1년 만에 그만두어야만 했다.
 
  학교 노트는...
 
 하지만 한 번 붙은 한국어의 불씨는 그리 쉽게 꺼지진 않는다. 일상적으로 한국어를 익히려면 어떻게 하면 될 것인지 이것 저것 머리를 쓴 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고등학교(물론 일본 고교) 수업 노트를 전부 다 한국어로 적는다는, 폭거와도 비슷한 일을 생각한 것이다.
 이 일은 동시통역 아닌 "동시번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선생님이 칠판에 쓴 것을 모조리 한국어로 번역해서 노트에 적는다. 그러나 고작 1년밖에 공부하지 않았는데 전부 다 한국어로 쓰는 것은 도저히 무리다. 설마 학교에 한국어 사전을 가지고 갈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 봐도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일본어를 적으면 나의 패배라고 생각한 나는 일본어를 한글로 적기로 했다. 누가 뭐라 해도 한글에 고집하고, 그것을 익히려고 한 고육지계였던 것이다. 그리 해서 한글 표기된 일본어는 집에 돌아가서 사전을 찾고 다시 한국어로 고쳐 썼다. 또 자주 나오는 한자어는 노트 맨 첫페이지에 가나다순의 단어 목록을 만들어 사전을 찾는 수고를 덜기도 했다.
 이러한 "학습법" 덕분에 한국어를 쓰는 능력은 비약적으로 늘어나, 상당히 복잡한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내가 대학 입시에 떨어져 재수한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2. 모어화자와의 상봉
 
  대학에 들어가서

 도쿄에 올라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한국어에 대한 정열은 변함이 없었으나 친구들과 노는 것도 즐겁고 제1외국어였던 중국어도 즐거워서 이전에 비하면 열이 약간 내려간 감은 있었다. 도쿄에는 재일교포가 많이 살고 있으며 같은 재일교포 학생도 많이 알게 되어 말보다는 그들과 사귀는것자체가 즐거웠다. 재일교포라고 해도 모두 2세, 3세들이기 때문에 나누는 말은 물론 일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일교포끼리라고 해도 한국어를 쓰는 일은 전무와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재일교포 친구가 갑자기 찾아왔다(아래 대화는 일본어로 했음).
 "야, 의성아. 부탁이 좀 있는데 말이야."
 "웬 일이야?"
 "실은 아는 사람한테 한국인 유학생을 소개받았는데, 내가 우리말을 전혀 못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상대가 돼 줄 수 없을까?"
 "아이구, 참. 근데 그 유학생이 어디 사는데?"
 "그거 말이야, 사실은 요 근처에 살거든. 걸어서 1분 거리야."
 "헉, 그렇게 가까워?"
 "응, 그러니까 지금부터 좀 가보자."
 그래서 둘이서 그 유학생 집에 가 보았다. 그는 막 일본에 온 사람이라 일본말은 거의 못했고, 마침 일본어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어유, 별 사람 다 알게 되는군)
하고 속으로 불안해하면서 그와의 교우관계가 시작되었다.

  나의 말은 "우리본말"?

 일본말을 못하는 유학생과 얼굴을 맞대어 한국어를 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한국어에 빠져드는 생활을 시작했다. 사교적인 그와는 곧 친해져 매일같이 서로 집에 놀러 가서는 티비를 보거나 기타를 치거나 장기를 두거나 바둑을 두었었다. 당구를 배운것 도 이 때쯤이다(덕분에 나는 같은 세대의 일본 거주자 중에서도 당구는 아주 잘 쳤다). 그리고 당연히 나누는 말은 한국어이다.
 나는 이 때 처음으로 본국의 진짜 한국어를 들어 보았다. 이른바 "서울말"이다. 부드러운 발음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제대로 회화를 나누려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발음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지만, 회화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가 하는 말이 나의 말과 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낱낱 발음이 다른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이외에도 말의 억양이나 문법적인 표현이 달랐다.
 결국 내가 민족 단체에서 처음 배운 강사의 말이 발음도 문법도 완전히 일본어화된 한국어였기 때문에 그 때까지 나는 그것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본말"("일본말"과 "우리말"을 합쳐서 만든 말. 내가 아는 사람이 만들었음)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ㅓ"와 "ㅗ", "ㅜ"와 "ㅡ"의 구별을 전혀 안 해 왔고 말할 때도 일본말을 하는 것과 같은 억양으로 말해왔다.
 (이것 좀 심각한데)
라고 느낀 나는 그 당시 막 시작된 NHK 라디오 "한글강좌"의 교과서를 사서 응용편을 듣기 시작했다. 아니,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모어화자 발음과 똑같이 흉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거울 앞에서 입모양을 확인해서 모음을 정확히 발음할 수 있도록 조심하고 유학생이 하는 말에도 주의를 기울여 들어 보았다. 발음이란 것은 참 신기한 것이라, 그럭저럭 스스로 발음 구별이 되면 알아들을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난관, 억양이다. 한국어 억양에 대해서 쓴 책은 거의 없다. 이것은 고생이 많았다. 모어화자를 흉내낸다고 해도 그저 흉내내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억양 정복에도 라디오 "한글강좌"를 활용했다. 우선 라디오를 녹음한다. 그리고 모어화자의 발음을 들으면서 어느 소리가 높고 어느 소리가 낮게 발음되는지를 하나하나 텍스트에 적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기는"은 "여"와 "기"가 낮고 "는"이 높게 들린다. 그래서 "는"이란 글자 위에 "′" 표를 단다. 이렇게 모어화자가 하는 말에 일일히 높낮이 기호를 달고 그것을 실제로 발음해서 한국어 억양을 체득한 것이다. 이 일은 상당히 정성을 들여서 익힌 기억이 있다. 한국어는 소리의 높낮이로 의미가 바뀌는 일이 없다고 알게 된 것은 더 나중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자연스러운 소리의 오르내림이 있다. 이것을 잘할 수 없으면 본국인에 육박할 수 없다고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본국인과의 회화, 서울말의 익힘이라는 피눈물 흘리는 (?) 노력 덕분에 1년 정도 지나면 그럭저럭 들을 수 있는 한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1년 걸렸으니 "우리본말"의 힘은 까볼 수 없다.
 

3. 이것이야말로 학문이다 ― 대학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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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나는 유학생활
 
  한국으로 떠난다!

 외대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나는 한국어 읽기, 쓰기와 회화를 대강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학 자체에는 그다지 불안감이 없었다. 흔히 말이 안 통한다거나 음식이 입에 안 맞는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말은 그럭저럭 할 줄 알고 음식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먹어 온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험했다. 듣는 것은 그럭저럭 들을 수 있는데 이쪽에서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입 안에서 우물우물하거나 버벅거려서 처음에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일상회화에는 인구에 회자된 표현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서 88 담배 하나 살 때도 교과서처럼 "88 한 갑 주십시오"라고 고지식하게 말하는 것보다는 "88 하나요∼"이면 될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 한 동안은 "더 자연스러운 표현"을 익히기 위한 훈련기간과 같았다.
 서울에서는 신림동에 있는 하숙집에 들어갔다. 하숙집은 학생들이 모여 사는 데라 거기서의 회화는 말을 놓고 하는 "반말"이다. 겨우겨우 회화에 따라갈 수는 있었지만 애들이 뭔가 있을 때마다 부르는 "열받어!"가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몇 번 같은 말을 들어서 이렇게 자주 쓰는 것이라면 외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사전을 찾았더니 "분노하다"라고 나와 있었다. 지금까지의 지식으로 "분노하다"는 "화가 나다"밖에 없었는데 "아, 일본어의 'むかつく(열받다)'구나"라고 감이 와 닿았다. 그렇군, 이게 일상회화군 하고 감명을 받고, 그 이후 이 하숙생활에 푹 빠지게 된다.
 또 언어적 경험으로 인상이 깊었던 것은 "골목"을 체험한 것이다. "골목"은 일어로 "로지(路地)"로 번역되는데, 나는 일본 로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종로 큰 길에서부터 실제로 "골목"에 들어가니 자신이 상상했던 "골목"과 전혀 다른 세계가 거기에 전개되어 있었던 것을 보고 "아아, 이게 골목이군" 하고 혼자 감동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의 PC통신

 2-3개월 지났을 무렵, 정보수집이라는 핑계로 한국의 PC통신에 가입했다. 사실은 그 당시 나는 일본에서조차 PC통신을 해 본 경험이 없었는데 어떻게 되겠지 하고 가볍게 가입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니 한글 자판도 모른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이건 큰일이라고 생각해서 같은 하숙집에 있었던 공대 학생에게 도움을 받고 (이 놈이 또 PC에 굉장히 밝았다) 무사히 "천리안"에 가입했다.
 PC통신망에 가입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아뭏든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우선 채팅부터 해 보기로 했다. 물론 자판은 한글로 쳐야 된다. 처음에는 전혀 못 쳐서 우왕좌왕했지만 며칠 지나다 보니 요령을 얻게 되어 한글도 꽤 편하게 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채팅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고, 그 때부터 몇 주 동안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채팅을 했다. 덕분에 타자는 완전히 마스터하고 게다가 보통 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칠 수 있게 되었다.
 PC통신을 사작해서 어떤 이득이 있었느냐면 위와 같이 한글 타자를 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외에도, 예를 들면 글을 빨리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난뱅이였던 나는 될수록 짧은 시간내에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넣으려고 한글로 된 글을 속독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본어를 읽는 속도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래도 두 배 이상의 속도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또 채팅에서는 입말이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입말을 문자로서 머릿속에 재입력시킬 수 있었다. 말하자면 입말을 외우기 위한 보완작업이라 할까. 예를 들어 "비행기"는 "뱅기"로 적히고 "어서 오세요"는 "어소세요"로 적히는 등 보통 글말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어형이 풍부하게 사용된다. 이것들을 통해 진짜 입말을 재확인한 것이다.
  지금도 가끔 한국의 PC통신에 접속해 보지만 아무래도 채팅은 피곤해서 하지 않는다.
 
  무서운 경상도 사투리의 위력

 내가 들어간 하숙집은 서울대 근처에 있었고 일곱 명 정도 있는 하숙생은 모두 서울대 학생이었다. 하숙집 아줌마는 전라도 사람이고 하숙생은 한 명을 빼고 모두 경상도 출신이었다.
 경상도 사투리는 색다른 사투리로 일본어 간사이 사투리에 비유된다. 상경해도 사투리를 그대로 쓰는 사람이 많고, 또 주변 사람들의 말을 경상토화시키는 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점은 간사이 사투리와 아주 비슷하다.
 이와 같이 생명력 있는 경상도 사투리에 둘러싸여 내가 하는 말이 경상도 사투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경상도 사투리는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높낮이 악센트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 일본어화자에게는 참으로 흉내내기 쉬운 말이다. 서울에 있는데도 서울말을 쓰지 않고 나날의 생활이 경상도 사투리로 영위되게 된다. 물론 나 자신은 서울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새 경상도 사투리가 되어 버려 오르내림이 심한 한국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서울에 가면 당연히 이쁜 서울말을 배울 수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와 보니 부산 사투리가 심한 한국어를 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본국인이 "서울말을 하다가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는 부산 사람 같은 말투다"라고 할 정도였다. 덕분에 일본에서 왔다는 것이 들키는 일이 줄어졌지만, 과연 이것은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인지(좋을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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