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것이야말로 학문이다 ― 대학원 시절

   대학원에의 길

 실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NHK 교육방송 TV 중국어 강좌를 보던 왕 중국어광이었다. 그래서 대학 학부시절에도 제1외국어로 중국어를 선택했을 정도였는데, 복부에 맞은 펀치가 서서히 아파지는 것처럼 학부 후반쯤이 되면 한국어에 푹 빠지게 되었다. 학부를 졸업할 무렵이면 슬슬 진로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한다. 당시는 이른바 "거품경제"가 한창이라 한 사람이 몇 군데나 취직 내정을 받을 수 있었던 시기였지만 그 당사자인 나는 취직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어떻게 한국어 공부를 계속해 나갈 것인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어라고 하면 도쿄외대이다. 그래서 우선 도쿄외대에 가서 교수님께 만나뵙기로 했다. 그 교수님이 이제 일본 한국어학의 중진 중의 중진이신 간노 히로오미(菅野裕臣) 선생님이다.
 간노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자네는 지금까지 한국어학이나 언어학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갑자기 대학원에 들어가기가 어렵지. 우선은 우리 수업을 들으러 오게"
 옳은 말씀이다. 그리 해서 나는 학부 졸업과 동시에 도쿄외대 학부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듣는 수업은 현대 한국어문법 개설, 중세 한국어, 원서강독 등 한국어학과 수업은 물론, 언어학 등 언어학의 기초적 수업까지 여러 분야에 걸쳤다. 여기서 나는 약간의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농땡이 학생이었던 나의 고정관념으로, 수업이란 것은 추잡한 대강당에서 진행되고 1년이 지나다 보면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외대 수업은 작은 인원으로 수업이 진행되는 데다가 참으로 자세하게, 깊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정말로 학부 수업인가 하고 노라는 동시에 그 "두께"에 경외마저 느낄 정도였다.
 여름방학 때에 나를 포함해서 대학원 진학 지망생 3명에게 과제가 나왔다. 현대 한국어 음운에 대해 자기 의견을 정리해서 리포트를 내라는 것이었다. 방학이 끝나고 3명은 리포트 비평을 들으러 선생님 연구실에 간다.
 "○○군, 자네 리포트는 ××선생님 책을 그대로 베낀 거잖아. □□군 것도 그러네. 나는 자기 의견을 쓰라고 했잖아"
 시작하자 마자 강한 펀치를 먹은 기분이다.
 "조군 것은 그래도 자기 의견을 쓰려는 태도는 보인다. 그렇지만 여기에 있는 트루베츠코이 음운론 이야기 말이다. 자네는 트루베츠코이를 제대로 읽었나?"
 공격의 화살이 가차없이 날라온다.
 "예. 트루베츠코이를 참고해서 써 보았습니다만"
 "자네는 트루베츠코이를 전혀 이해 못하고 있어. 트루베츠코이를 완전히 왜곡하네. 이건 말도 안 돼"
 "예… 옛.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앞길이 험한 길이다.
 대학원 입시는 전문 외국어(즉 한국어), 제2 외국어, 언어학의 세 과목이었다. 1차시험은 겨우 붙고 2차시험으로 간다. 2차시험은 면접이라고 들었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것이 한국어학과의 무서운 점이다. 요컨대 선생님이 독자적으로 "3차시험"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전부터 "자네는 제2 외국어는 중국어로 시험을 본다고 했지? 왜 영어로 보지 않는가? 2차시험 때 내가 영어 시험을 낼게"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대로, 2차시험 시간이 되자 마자 선생님의 영어시험이 실시되었다. 언어학 원서를 건네 받고 1시간에 번역할 수 있는 만큼 번역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헉헉거리면서 1시간을 지냈더니
 "뭐야, 그 정도 밖에 번역할 수 없는가? 이제 됐다. 그럼 이것을 읽어 보게"
 그 다음에 받은 것은 중국 조선족에 관한 중국어 원서였다. 소리를 내면서 읽어 간다.
 "흠, 발음은 그럭저럭이네. 그럼 다음은 이거다"
 이번엔 "훈민정음"의 한문 원문이 눈 앞에 펼쳐졌다. 점점 의식이 희미해진다.
 "한문 정도 유창하게 읽을 수 없으면 말도 안 되지"
 쉴 새 없이 잇달아 선생님의 "3차시험"이 진행된다. 아까부터 진땀과 식은땀이 번갈아 흘러 나온다. 정말로 공포의 "3차시험"이었다.
 시험도 무사히(?) 끝나 다행히 대학원생이 된 나에게 간노 선생님은 꼭 못을 박으셨다.
 "할 수 없지. 일단 자네를 입학시켜 주게. 그렇지만 자네는 새빠지게 노력을 안 하면 따라갈 수 없네. 하여튼 정신없이 공부하게. 그리고 참, 2년 만에 졸업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게. 자네 경우는 3년을 각오하도록"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자 마자 3년 졸업이 확정되었다.

   스승은 이리도 엄하고 따뜻하다

 대학원생이 된 나는 뭔가 모르지만 아무튼 열심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대학원에 붙었다고 약간 방신했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간노 선생님이 여름방학 전에 과제를 내셨다. 방대한 북한 언어학 잡지 중의 논문을 뽑아내서 목록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목록 작성 방법을 선배에게 물어 보라는 충고까지 해 주셨다. 그러나 무엇을 멍하니 들었는지, 나는 선배에게 제대로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 페이스로 목록을 만들어 버렸다.
 결과는 비참했다. 수업에서 나눈 목록은 도저히 목록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는 가만히 계셨던 선생님이었지만 나중에 나를 불러내셔서 대로하셨다. 대로하신 것도 당연하다. 내가 학문적인 작업도 제대로 못 했을 뿐더러, 당신 제자의 무능함을 중목 앞에 드러내게 만들어 선생님 얼굴에 먹칠을 한 꼴이니.
 "자네는 이 정도 일도 제대로 못 하는가? 이런 것도 못 하는 인간은 언어학을 배울 자격이 없다! 자네는 인제 학교에 안 와도 된다. 내일부터 마음대로 하게"
 나는 파문선고를 받아 버렸다. 선생님 말씀은 참 옳은 말씀이라 자기가 너무 멍청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오지 말라"고 해서 "예, 알겠습니다" 하고 사라지고 말면 정말로 어이없는 인간이다. 나는 창피를 무릅쓰고 평상대로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파문"한 나에게 말을 걸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담담하게 수업을 진행하셨다. 대학원의 엄격함을 한참 실감한 시기였다.
 이튼해 여름방학 때, 나는 그 동안 써 오던 석사논문의 초고의 초고를 선생님께 보여 드리려고 선생님 댁에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이 그것을 보실 확신도 없고, 인사를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잡았는데, 선생님은 생각보다 경쾌하게 "가져 오게"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 댁에 가면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끼고 마주 앉았다. 내가 드린 초고를 선생님은 한 동안 쭉 보시다가는 이윽고 말을 꺼내셨다. 이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여기는 이러이러한 견해도 있다, 자네는 이러이러한 문헌을 읽어 보았는가 하는 비평이었다. 선생님은 조잡하고 불완전한 내 초고에 대해 진지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비평을 해 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마침 (학문에서 실수했다면 학문에서 그것을 만회하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리 해서 나의 "파문"은 드디어 풀리게 되었다. 나는 스승의 엄함을, 또 따뜻함을 알고 다시 한 번 감복했다.
 간노 선생님이란 분은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 "걸어다니는 언어학"이라고도 말해지고 때로는 "괴물"이란 별명까지 받는 선생님의, 언어학에 대한 열정과 지식은 말 그대로 "스승"이다. 스승이란 사람은 말이 적고 제자를 쉽게 칭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제자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기대가 숨어 있다. 이러한 스승에게 배울 수 있었던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한국어학이란 바로 언어학이라

 내가 이 길에 나서기 전까지 "한국어학"은 한국어에 능숙하고 자유로이 구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한국어학의 길에 나서다 보면 그것 뿐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알게 되었다. 내가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고 매진하게 된 것도 처음에는 "조총련학교 학생보다 우리말을 잘할 수 있게 되고 싶다"였고 그 다음에는 "외대 학생 만큼 말할 수 있게 되고 싶다"였으며 마지막에는 "(상당히 무모하지만) 본국인과 똑같이 말할 수 있게 되고 싶다"라는 충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마지막 것을 제외하고 대강 달성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한국어학이란 "학문"은 거기에 그치지는 않았다.
 "어학"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한국어학은 분명히 "언어학"의 한 분야라는 것이, 한국어학이 "학문"인 유연이라고 알게 된 것은 외대에 청강하러 가고 나서부터였다. 예를 들면 한국어 문법 강의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언어학적 지식이 요구되었다. 강의를 하시는 분은 그 "괴물", 간노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이 왜 "괴물"인지는 선생님 강의를 받아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선생님의 전문 분야 중 하나가 동사 애스펙트인데, 우선 애스펙트를 알려면 애스펙트 연구의 본고장인 러시아 언어학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어에 대한 지식이 요구된다(따라서 대학원 수업 공식 시간표에 없는 "간노 러시아어" 수업이 한국어학과 대학원에는 존재했다). 물론 콤리 등 구미의 지식은 기본이다. 거기에다가 다른 슬라브어, 예컨대 폴란드어나 체코어의 동사가 예로서 나온다. 이러한 유럽 언어학 이야기를 하면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라틴어, 희랍어 문법의 지식도 약간은 필요하다. 눈을 돌리면 한국어와 문법구조가 유사한 일본어 문법의 연구를 분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중세 한국어 수업에서는 당시의 어학서를 통해서 중국어, 몽고어, 만주어를 동시에 대조하고, 문자론에 이야기가 나가면 티벳문자 등도 나타난다. 한국어를 기축으로 해서 세계 갖가지 언어와 직접, 간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한국어학"이다. 때마침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선생님은 이 학문을 "한국언어학"이라고 명명하셨지만 "Korean linguistics"는 바로 "한국어를 언어학하는" 학문인 것이다.

   시부 쇼헤이 선생님에 대해

 내가 도쿄외대에 와서 새로 배운 것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중세국어는 나의 관심을 항상 끌어 온 분야이다. 외대에 청강하러 온 그 때부터 나는 중세어 강의를 받았지만 현대어 문법만 해도 체계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당시로서, 중세어 따위는 이해될 리가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중세어 수업은 지바(千葉)대학교에서 시부 쇼헤이(志部昭平) 선생님이 와서 시간강사로 가르치셨다. 당시 시부 선생님과 안면이 없었으나 어떤 학술지에 얼굴 사진이 나와 있어서 선생님 얼굴은 알고 있었다. 실은 나는 수업을 듣기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었다. 왜냐 하면 그 사진을 보는 한, 마피아 같은 생김새라 어떻게 보아도 무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수업 날, 나는 전전긍긍하면서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쁜 오산이었다. 선생님은 마피아는커녕 온화하고 참으로 신사다운 분이셨다. 깔끔한 양복에 커프스 단추를 끼운 와이샤쓰, 그리고 멜빵이 달린 바지를 입으신 멋쟁이셨다. 나는 중세어 수업을 매주 즐겁게 기다리게 되었다.
 선생님의 매력은 그러한 인품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자로서 학문과 마주서는 자세에 있음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나는 총합 2년간 선생님 강의를 들었지만 항상 느낀 것은 연구가 치밀하고 엄밀한 점, 그리고 연구에 대해 진지하단 점이다. 중세어 문헌 강독에 들어가지 전에 우선 서지학적인 견지에서 원본을 자세히 검토하신다. 몇 가지 판본을 대조하면서 어미(魚尾)가 어떻게 변화된다거나 활자 종류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서 시작해 단어의 변화 등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면밀한 고증을 하신다. 우리 젊은 사람들은 본문의 문법해석에만 눈이 가고 이러한 기초적인 검토를 소홀히 하기 쉽지만 시부 선생님은 안이한 타협을 결코 허용하지 않고 확고한 바탕을 구축한 후에야 문법해석으로 나가신다.
 이와 같은 강의를 듣는 내가 즐겁지 않을 수가 없다. 매주 매주 지적 흥분이 돋구어지고 수수깨끼를 푸는 것처럼 중세어를 읽어 나가다가 어느 새 나도 그럭저럭 중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이것은 전적으로 시부 선생님 덕분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좀더 노력해 보자고 마음을 다짐하던 차에 시부 선생님은 병에 쓰러져 버리셨다. 처음에는 겨울의 계절강좌를 연다고 하시더니 병세가 좋지 않아 마침내 돌아오지 않는 분이 되어 버리셨다. 저 자신으로서도, 그리고 당연하지만 한국어 학계로서도 시부 선생님을 잃어 버린 손실은 헤아릴 수 없다. 지금은 다만 선생님이 뿌려 가진 중세어의 씨앗을 어떻게든 키워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